알랭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 1. 흔히 아픔과 고민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한다. 예컨대 우리는 탁자 다리에 발가락을 찧으면 비로소 발가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가락이든 더 큰일이든 문제가 생기거나 아플 때에만 따로 생각하게 된다.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반대 주장도 있다. 생각이 아픔이나 문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것들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때에는 역방향의 공식이 성립된다.
쉽게 말하면 앞의 것은 지성인의 주장이고, 뒤의 것은 자연주의자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햄릿은 문제가 생겼기에 그렇게 생각이 많았는가?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생겼는가? (p.267)
사람은 언제 생각을 하는가. 나는 언제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생각을 하고 나면 '상태가 괜찮아져 있었'기에 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다. 이 논리대로라면 나에게 생각은 정리할 거리가 있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물이나 문제를 인지하고 난 다음 일어나는 반응이다. 탁자 다리에 발가락을 찧으면 아플 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그 아픔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발가락을 끌고 테이블 근처에서 서성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선 명제 후 생각의 구도. 어설픈 지성인이자 의도된 자연주의자, 뭐 그런 것이다. 그런데 햄릿은 아무래도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생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2.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ㅡ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된다. 그들의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이 다 필요한 언어와 같다. 일곱 살 아이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은 말도 안 되는 허섭스레기이며, 만약 그의 작품이 일곱 살 아이들에게만 읽힌다면 셰익스피어는 그 아이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ㅡ마찬가지로 앨리스의 가능성도 애인이 공감해주는 한도에서만 뻗어나갈 수 있다. (p.318)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이해받지 못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이해받지 못하는 상태가 곧 내 세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상대의 상식선 밖으로 튕겨나가 갈 곳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 모두에게 필요한 언어다. 나의 가능성은 그래서 내가 하는 행동을 어색해하지 않는 이 앞에서 더 자유롭게 커질 수 있었고, 나의 말은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이에게 던져지게 되었다. 16살 때 피천득 『인연』의 첫 페이지를 펼치고 세 단락 정도 읽어내리다 책을 덮었다. 그건 중3 여자아이에게는 그닥 감흥을 주지 못하는 내용들이었다. 내가 『인연』이라는 책을 이해하고 좋아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 스무 살이 넘었을 때다. 그 무렵부터 『인연』은 교과서적인 냄새를 걷어내고 피천득 선생님의 향긋한 필체로 다가왔다. 공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람 앞에서 가장 나다운 사람과 결혼하라는 유희열의 말이 생각난다. 나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세계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앨리스가 에릭 앞에서 오롯한 자신이 되지 못한 이유도 거기 있었다. 공감의 한계. 이유가 있다면 그게 아니었을까.
# 3. 따라서 앨리스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있으면 아주 흥미로운 인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스스로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결론지었다. 에릭과 같이 앉아 저녁을 먹을 때면, 적당한 상대만 있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리라는 자신감을 잃고,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ㅡ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어할 수 있는 것까지 타인이 결정한다는 증거다. (p.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