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에는 주변을 조용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비록 움직이지 않는 물건을 그린 거지만 정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 때문인지 정물화를 보면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짧은 순간이 길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부동과 정적 속 몰입의 순간이에요."

 

늦은 오후 이태원에 위치한 토마스 파크 갤러리에서 박상미 작가가 번역한 가이 대븐포트의 《스틸라이프》 북토크가 열렸다. 박상미 작가가 운영하는 토마스 파크 갤러리에서는 8명의 작가가 참가한 정물 전시 'The Still Center of Life'가 함께 열리고 있었다. 

 

스틸라이프(Still Life)는 그 자체가 미술 용어로 정물화, 정물화 기법을 뜻한다. 정물은 과일, 꽃, 화병, 잔, 와인병 등 정지해 움직이지 않는 물건 그 자체이자 이를 선반에 놓고 그린 그림이다. 그동안 정물은 대중에게 다소 심심한 미술의 한 분야 정도로만 인식돼 왔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과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그린 정물화를 보면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박상미 작가는 북토크에서 바로 그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정물이 일상과 관련돼 천대 받아왔다는 사실. 그는 정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매일 보고 만지는 물건들이 정물이라면 정물은 일상을 가장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래서 문명의 순환은 정물이란 장르의 순환이기도 하다. 작가들에게 정물은 실험하기 좋은 형태였고 자연스럽게 정물은 실험적 장르가 되었다.

 

어떤 정물은 심플하고 아름다운 식탁에 대한 예찬이기도 하다. 박상미 작가는 식사와 관련한 책의 한 부분을 낭독하며 우리가 매일 먹는 식사가 우주의 순행과 연결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내가 잘 먹어야 우주가 잘 돌아가는데 내가 잘 먹는다는 건 어떠한 것인가. 최근의 식사는 어떠했는가. 더 나아가 최근에 읽은 책은 어떠했는가. 그것이 별들의 순행을 방해하지는 않는가. 결국 그 질문들은 내 책상 위에는 과연 뭐가 있는지, 식탁 위에는 과연 뭐가 있는지, 나의 정물은 과연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정물은 무엇일까.

 

'작은 사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월의 순간들  (0) 2022.12.27
영화 캐롤과 사울 레이터  (0) 2022.01.29
80년 된 미술관  (0) 2020.02.19
태평양의 물고기들  (0) 2020.02.12
내 머릿 속의 두리안  (0) 2019.06.25
Posted by sputnik.K :